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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동 봉사 여왕 윤기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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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을센터 댓글 0건 조회 550회 작성일 20-11-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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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마을지원센터가 2020년 새로운 마을살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마을 구석구석을 탐구했던 지난해에 이어 관내에 유관기관들을 알아보는 THEMA.1 마을공동체가 자란다,  마을을 살아가는 주민공동체의 활약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THEMA2. 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강동의 과거에서 미래를 조망해 보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까지 세 가지 테마로 기획되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강동사랑으로 이끄는 '강동을 살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마을 어르신이 살아온 강동 이야기 



#24_"동(洞) 이름 바꾸고 뭐든 잘됩니다" 


       강일동에서 평생 봉사해온  윤기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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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에게 복이 될 거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마을 봉사였다. 곧 자신이 이름처럼 사람을 챙기고 나눠주는 일을 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옛 하일동 새마을부녀회부터 주민자치위원회 위원, 청소년 선도회장, 강동구 재향군인회 여성회장 등 봉사와 이어지는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렇게 사십 년을 지내고 보니 어느새 80줄에 들어섰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남편과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일동에서 모르면 간첩'이라는 윤기분(80) 씨의 삶은 그렇게 봉사와 떼어 놓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시가(媤家)는 강일동 그러니까 옛 하일동에서 18대를 살아온 강매터 마을 광주 이씨 토박이집안으로, 윤기분 씨는 23살 때 봉고차를 타고 시집을 와 꼬박 57년을 살았다. 2천 년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로 강일동 사람 대부분 살던 마을을 떠났지만 윤기분 씨네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고향땅에 그대로 머물렀다. 강일 리버파크 10단지에는 옛 하일동 주민들이 지금도 많이 모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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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근황과 건강은 어떠신가요? 다니다가 집에 계시려면 갑갑할 듯한데요. 

▶지난해 10단지 경로당 회장을 마지막으로 이젠 집에서 화초를 돌보고 얼마 전부터 배운 서예를 연습하며 시간을 보내요. 오래전, 협심증이랑 암으로 여러 번 수술을 해서 늘 몸조심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사다 준 안마 체어와 러닝머신으로 살살 운동을 해요.


​▷이 넓은 집을 혼자 관리하세요?

▶나 혼자 충분히 가능해요. 자꾸 몸을 움직여야 운동이 되지요. 화초도 자꾸 손길을 줘야 잘 자라고 남편을 위해 매 끼니 따뜻한 밥과 반찬을 만들고 틈틈이 간식도 챙겨요. 남편이 청소나 빨래 널기 그리고 마른 빨래를 걷어 정리하는 일을 도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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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슬이 엄청 좋으시네요. 밖에서 활동하시는 거 모두 이해하셨어요? 

▶결혼하고 살면서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어요. 충돌이 일어나면 일단 먼저 숙였다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이야기를 해서 진실을 가렸어요. 그러면 남편도 이해하더라고요. 또 내가 큰 수술을 여러 번 해서 잘 먹지 못하고 매일 먹어야 할 약도 많은데 식사 대신 먹으라고 큰 아들이 구해서 보내주는 생밤을 남편이 매일 10개씩 까주고, 그날 먹을 약을 물과 함께 식탁 위에 챙겨줍니다. 남편 덕에 평생 잘 먹고 잘 입고 또 봉사활동도 잘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늘 "고맙다" 말하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동안 함께 못한 시간을 이제 함께 하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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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동 아니 하일동에는 언제부터 살았나요? 

▶충북 중원에서 제법 유복한 집 4남 1녀의 막내 고명딸로 태어났어요. 우리 마을에 살던 남편 당숙모가 중매를 해서 얼굴 한 번 보고(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하일동 광주 이씨 집안 둘째 며느리로 시집왔어요. 내가 23살, 남편은 26살 때였지요. 시댁에 시어머니는 안 계시고 상이군인이었던 시아버지와 시숙과 동서 그리고 시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도 함께 한 지붕 아래서 지냈어요. 시어머니 시집살이보다 동서 시집살이가 더 하다더니 아휴.... 참고 참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4년 만에 분가를 했어요. 시댁은 농사를 크게 지어 살림이 넉넉했는데 동서가 쌀 한 말이랑 보리쌀 닷 되를 쥐어 내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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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떻게 살았어요? 

▶나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당장 밥해 먹을 솥이 없어 이웃집에서 빨래 삶던 솥을 얻어 왔는데 도저히 거기다 밥을 해서 식구들을 먹일 수가 없더라고요. 기왓장을 깨서 솥 바닥이 깨지라 닦은 다음에 멀겋게 죽을 쒀서 내가 먼저 먹고 제대로 밥을 해서 남편에게 차려줬어요. 5월에 나와서 햅쌀 나올 때까지 견뎌야 하는데 끼닛거리는 모자라고. 한창 큰 애 젖 먹일 때여서 배가 너무 고팠어요. 들일하러 가는 남편도 굶기 일쑤였고. 이웃집에서 밥을 하는 냄새가 나면 우물물을 퍼서 배를 채웠어요. 밥 한 사발로 사흘을 나눠먹다가 결국 쓰러졌지요.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친정이나 이웃에 손 벌리지 않고 버텼어요.

▷책에나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남편이 참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강해요. 당시 하일동에 이화산업이 있어서 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많이 했는데 그 회사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어요. 그리고 밤새도록 볏짚으로 새끼를 꽈서 타래를 여러 개 만든 후 리어카에 싣고 종로까지 가서 팔아 아이들 학비를 대곤 했지요. 돼지도 100마리 넘게 쳐서 살림에 보탰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분가한 지 4년 만에 논도 닷 마지기 사고, 더 있다가 집도 샀어요. 집 살 때는 친정 도움을 받았어요. 제대로 먹지도, 사는 집 꼴도 엉망인 모습을 본 친정 오빠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줬어요. 나중에 돈 벌어서 제일 먼저 갚았어요. 내가 남에게 신세 지고는 못 살아요. 줬으면 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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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동에 처음 왔을 때 풍경이 기억나세요? 

▶땅이 너무 질어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사람들이 그래요. 한강이랑 가깝다 보니 장마만 오면 마을에 물이 들어왔어요. 을축년에는 마을이 몽땅 잠기기도 했대요. 제방이랑 배수장 시설이 들어서면서 농사지을 땅이 생겼어요. 우리가 시댁을 나와 이곳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되어 서울 시내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트럭에 실려 들어왔어요. 한 집당 6평 남짓한 땅을 받아 움막을 지었고 농사품 말고는 돈 버는 일이 없다 보니 다들 어렵게 살았지요. 이때부터 하일동이 달동네니 판자촌으로 불리며 강동구에서 가난한 동네로 알려지기 시작했죠. 내가 39살부터 하일동 새마을부녀회 활동을 했는데 이미 원주민보다 이주해온 철거민들이 하일동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어요. 큰말에 30가구, 강매터에 10여 가구, 가래여울에 10여 가구, 일자 마을에 7가구 해서 토박이들은 주변에 주로 살았어요.



​강일동 곧 옛 하일동은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옛날 모습과 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도시 속의 농촌 씨족마을이었다. 평촌(벌말)마을의 청송 심씨, 강매터 마을의 광주 이씨, 가래여울의 남평 문씨, 구산 마을의 경주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급속한 개발로 지켜야 할 옛 풍습과 정취가 사라지고 원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산신제와 가래여울 마을, 구산성지와 옮겨간 구산 성당 말고 옛 하일동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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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동에서 60년 가까이 살았는데 뭐가 좋은가요?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산산조각 났지만 사람들이 정도 많고 참 인심 좋은 마을이었어요. 외부에서 이래저래 말을 만들었지 하일동 사람들은 철거민, 원주민 구분 없이 서로 의지하며 사이좋게 살았어요. 풍경이랑 공기 좋은 것은 기본이구요. 동네에서 경로잔치를 하면 3~4백 명은 쉽게 모였고 돼지 잡고 음식 해서 함께 나눠 먹었어요.

▷강일동의 봉사 여왕으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수상도 많이 하셨다지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이 타고났음을 알았어요. 사실 아이들에게 좋을 거란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그 덕분인지 실제로 아이들도 모두 착하고 바르게 잘 자랐어요. 대기업 임원, 교사로서 제 본분을 다하고 모두 효자 효녀이기도 해요. 큰 아들은 학교 갔다 오면 교복을 입은 채로 동네를 돌며 돼지 먹일 뜨물을 얻어왔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힘들게 벌어 공부시켜주는 부모가 고맙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지요. 이렇게 살아온 이야기를 쓴 수기로 서울특별시장상도 받고 다양한 봉사활동 덕에 서울경찰청장상, 보건복지부 장관상 등 크고 작은 상을 많이 받았네요.


​▷특히 동 이름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름에 아래 하자가 들어가서인지 하일동 시절에는 강동구에서 동 대항을 하면 꼴찌를 도맡아 했어요. 게다가 가난하고 못 사는 동네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여러 가지로 속상했지요. 동 이름을 바꾸자는 의견을 냈고 원래 살던 토박이들은 반대했지만 인원수가 훨씬 많았던 철거민들은 찬성을 해서 결국 동장에게 건의하고 구청에 알아본 후 투표를 거쳐 통과시켰지요. 2000년의 일이에요. 이름을 바꾼 후 그해 가을 동대결 행사에서 강일동 이름으로 처음 우승을 했고 여성 씨름대회에서도 1등을 휩쓸었어요. 마을 개발도 이뤄지고 그 후 모든 일이 잘 풀려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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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바깥일 보느라 못 챙겼던 남편 잘 챙기며 재미나게 살고 싶어요. 남편이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했는데 이번 코로나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어요. 술을 한 번에 딱 끊었지 뭐예요. 속 버리지 말라고 토종꿀에 마늘과 온갖 약재를 함께 넣어 삼십 년째 다려주고 있는데 이것 때문에 방송에도 나갔어요. 남편이랑 행복하게 살다가 구순이 되면 신식으로 결혼식을 다시 한 번 하고 우리 사는 이야기로 또 한번 방송을 타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강일동의 옛 모습을 삶으로 모조리 기억하는 윤기분 씨. 비록 지금은 같은 땅 다른 집에 살고 있지만 소박하고 정다웠던 하일동 시절을 결코 잊지 못한다.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라기 보다 좋지 싶어 사십 년 가까이 해온 봉사활동은 결국 강일동에 뿌리 내린 자신의 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오롯이 살아내는 일이었다. 한 생애를 마을과 함께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코 멈춤없이 기록돼고 남겨져야함을 하일동 아니 강일동 윤기분 씨가 말해주고 있다.


<강동마을기록활동가   유  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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