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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동 향토사학자 정영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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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을센터 댓글 0건 조회 732회 작성일 20-06-3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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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출발하는 강동구마을지원센터가 2020년, 새로운 마을살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마을 구석구석을 탐구했던 지난해에 이어 관내에 유관기관들을 알아보는 THEMA.1 마을공동체가 자란다,  마을을 살아가는 주민공동체의 활약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는 THEMA2. 마을을 움직이는 사람들, 강동의 과거에서 미래를 조망해 보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까지 세 가지 테마로 기획되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강동사랑으로 이끌  시리즈 '강동을 살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THEMA3.  나의 살던 마을은 : 마을 어르신이 살아온 강동 이야기 


#9_ "글은 바로 사람입니다"   

     미수(米壽)기념 <정사재>문집 펴낸 암사동 정영기 선생




글은 사람이라고 했다. 글을 보면 쓴 이의 품격과 삶이 그대로 드러난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따라서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가끔 사람보다 글이 나은 경우도 있지만 진실은 곧 드러나게 마련이다.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자 강동의 독보적인 향토사학자, 초당 정영기 선생. 그는 평생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암사동에 60년 가까이 거주했고 강동구 문화유적을 기록으로 꾸준히 남겨온 정영기 선생이 지난 4월, 미수를 기념하는 자신의 세 번째 문집 <정사재(靜思齋)>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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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중하 세 권으로 이뤄진 <정사재> 문집은 그동안 정영기 선생이 각종 잡지에 연재했던 기고와 자신의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글 중 습유(拾遺: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혹은 주어서 모은 글) 한 글을 합하고 사진을 보태어 꾸몄다. 총 7부로 구성된, 1천5백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자신이 발간한 4권의 시집에서 선별한 시와 그에 어울리는 그림, 강동문화원 잡지 <좋은 동네>에 연재한 향토사 관련 글, 우리 고장의 문화유적을 답사하여 지역신문 <토요저널>에 40회에 걸쳐 올린 시리즈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문학지 <강동문학>에 논문 형식으로 저술한 '강동의 역사인물 재조명' 그리고 순수 문예지 <문학마을>에 2002년부터 애정을 갖고 연재했던 '문학기행' 등이 실려있다. '문학기행'은 단행본으로도 나올 뻔했는데 세 번째 교정 단계까지 갔으나 편집자에게 일이 생기는 바람에 중단하고 말았다.

문집을 접한 강동 사람들은 '선비요 문인인 초당 선생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집'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우리말로 된 시뿐 아니라 한시, 영시에도 능하고 시조, 서예는 물론 그림과 문헌연구에도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데 <정사재>문집이 현현(顯顯)한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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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역사에 기릴만한 문집이라 여겨지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컬러 인쇄 등 모든 게 만족스럽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했는데 집사람은 더 쓰라고 해요. 90세까지 살면 4집을 내겠다 했어요. 네 번째 문집은 더 좋은 글로 꾸미고 좀 가볍게 만들려고요. 이미 원고도 삼분의 이 넘게 모았어요. 다만 3집에 자서전적인 글이 좀 들어갔는데 원래는 안 넣으려 했지만 나이 탓이지...

▷활력이 넘치십니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그럼요, 보다시피 아주 건강해요. 머리 염색도 꼭 했는데 얼마 전 양 눈 모두 백내장 수술을 한 후 염색이 안 좋으니 피하라는 말을 듣고 요즘은 안 해요. 머리가 좀 더 길면 상투를 틀어올려 멋진 예술가로 변신할까 봐요(크게 웃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시부터 하루 한두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요. 걷지 않으면 죽는다 생각하고 아파트 주변 정원이랑 근처 정자, 숲 그리고 망월 호수 둘레를 열심히 걸으며 운동합니다.


▷많은 책과 문집을 낸 것으로 아는데 원래 글을 잘 쓰셨나요?

▶내가 강동에서만 이름이 있고 국내에서는 대단하지 않아요. 문집 서문에 소개된 그대로의 사람이에요. 사실 어릴 때부터 세계적인 문호가 되고 싶었어요. 국민학교 4학년 때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책을 엄청나게 읽었어요. 가난 때문에 사보기는 어렵고 해서 도서관에서 빌려봤어요. 독서를 많이 하면 돌대가리도 천재가 될 수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도서관 책을 몽땅 읽겠다는 생각으로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가 문 닫을 때까지 책에 파묻혀 살았어요.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를 다녔지요. 연애편지를 잘 쓰다 보니 운명이 바뀐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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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기 선생의 고향은 전남 보성 대룡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초당리이다. 1936년, 조부가 장손에 대한 기대를 담아 이름 지은 와룡재에서 하동 정가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큰 숙부를 따라 여수로 이사 갔다가 해방되던 해 다시 보성으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나 주변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서울에 와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청계천 복개공사 현장에서 밤샘 막노동을 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시멘트 투성이인체 강의실에 들어오는 그를, 학우들은 빨치산이라 불렀다. 간신히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징집, 입대했다가 부상을 당했고 97년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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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65년에 대학 친구였던 유준웅이가 자기랑 학교를 만들어 발전시켜보자고 제안했어요. 친구네가 그때 서울 변두리였던 강동구 천호동에 적산 땅을 크게 갖고 있었는데 그게 지금 성덕고등학교 자리에요. <천호고등공민학교>를 세워 준웅이는 주간, 나는 야간을 맡았고 교장 교감이 되어 학교를 키워나갔지요. 나중에는 고등학교 과정이 필요해서 <천호상업전수학교>도 설립했어요. 가난하지만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많아서 아주 잘 됐어요. 70년대 초에 친구는 학교를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이민을 가버렸지만 나는 그대로 남아서 학교를 더 키웠어요. <위례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한 후 전국에서 학년 당 학생 수가 가장 많은 학교로 이름을 날렸는데 한 학년에 주간 12반, 야간 12반이라면 말 다 한 거지. 교사로도 인정받고 운영자로도 인정받은 그때가 내 생애 최고의 전성기였어요.

▷당시 강동구 풍경을 기억하세요?
▶내가 70년대 초반, 새능말(지금의 암사 1동) 근처에서 전세를 살았는데 집 주변은 말할 것 없고 학교 주변도 허허벌판에 집들도 띄엄띄엄 있었어요. 전부 야산에 언덕에 논 밭은 조금이었지요. 농사짓는 사람들보다 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다들 가난하게 살았어요. 선사유적지 부근 한강가에 있던 점마을에서 만든 토기를 배편으로 여기저기 내다 팔기도 했어요. 물론 제일연와랑 한일연와 같은 대(?)기업과 벽돌 공장도 있었지만 대부분 소규모 가마에 물레를 돌려 저금통이며 화분, 토관, 연탄 박스, 젓갈독을 만들어 팔았어요. 구천면에서 서울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때여서 근처 길동이나 둔촌동도 마찬가지였고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살던 천호동 그러니까 곡교리가 조금 번화했달까. 오죽하면 기차를 소리는 들어봐도 본 적은 없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어요. 당시 강동구는 전라도 깡촌보다 살기가 더 어려웠어요. 물론 잘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안말에 있던 99칸 부잣집이 망한 후 고분다리의 집들은 모두 그 집 목재로 지어졌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양씨 집성촌인 양지마을에도 기와집이 꽤 있었어요. 선사유적지 쪽은 죄다 움막에 판잣집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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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암사동에서만 사셨나요?
▶아유, 말 말아요. 90가까이 사는 동안 열다섯 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어요. 새능말 전셋집부터 단독주택, 제1주택, 강동아파트, 프라이어 팰리스, 태천해오름아파트....그리고 지금 여기서 가장 즐겁고 기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교사 시절, 새로 지은 벽돌조 단독주택을 거의 무상으로 살게 해 준 고마운 사람도 있었고 몇 년 전에는 집에 불이 나서 귀한 가보와 작품을 일부 잃기도 했지만 이 모든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지금은 아주 행복합니다. 4년 전에 국가유공자 특별분양을 받아 이곳 미사로 이사 왔지만 우리 가족의 본적지는 여전히 강동구입니다. 강동구에서 활동을 많이 했고 죽을 때까지 강동에서 하던 일을 계속 해갈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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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사람들과의 만남이죠. 살면서 수많은 친구와 좋은 스승, 선후배, 제자들을 만났어요. 많은 인연들이 있지만 특히 마지막 남은 선비였던 송담 이백순선생님 그리고 2002년 한일 친선문화교류를 계기로 만난 마쓰나에 사끼꼬 선생과의 우정을 특별히 말하고 싶어요. 두 분 모두 주로 서신으로 교류했는데 송담 선생님께는 근대 유학과 한학 그리고 선비정신을 배웠어요. 사끼꼬 선생이 매달 한 번, 4미터도 넘는 두루마리에 붓으로 써보내는 편지는 지금 길이만 해도 8백 미터에 가까운데 내가 보낸 답장과 함께 나중에 서한집으로 출판하면 세계적인 문학작품이 될 거예요. 그 외에도 교회활동을 하던 젊은 시절, 나이 들어 강동에서 문인활동을 하며 만난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소중하지요.

▷앞으로 남은 숙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 세 번째 문집에서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했어요. 이제 강동구 사액서원이었던 구암서원이 암사동 선사주거지에 복원되고 1919년 상일리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구천국민학교(현 상일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 게 여생의 소원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보다 나은 네 번째 문집을 발행하는 일도 숙제로 남아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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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청기와 전통한옥으로 지은 종가와 기념관을 구암서원(암사동 선사주거지 근처) 옆에 두고 싶었는데 이제 나이가 많아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어요. 자손들이 성공하면 언젠가 그 꿈을 이뤄줄 거라 믿어요. 미리 마련해둔 와룡재와 정사재 현판을 처마에 걸고 내가 소중하게 보관해온 집안의 장서와 고가구들을 영구 보존해 주면 좋겠어요.

바람이 유난히 시원한 집이었다. 그 바람에 흔들리는 화초들도 상당히 기운차 보였다. 죽은 줄 알았던 화초가 다시 꽃대를 올리는 집, 사통팔달 햇볕과 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이곳에서 인생 오후를 지내는 초당 정영기 선생의 삶은 참으로 복되고 건강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네 번째뿐 아니라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정사재> 문집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강동마을기록활동가  유 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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